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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 (393장)
350장 ‘우리들이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의 찬송은 작시 작곡자 모두 미상으로 되어있는 찬송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의 저작 배경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찬송가의 가사와 멜로디를 살펴볼 때 경쾌하고 활발한 행진곡풍으로 보아 군대에서 사용하던 행군가를 편곡 정리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그리고 싸움에 임하는 군사의 자세를 영적으로 승화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신 군사는 어떠한 싸움에서도 패배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다는 승리감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찬송가입니다.
전투의 3요소는 화력, 기동력, 병력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움을 하는‘병사들의 사기’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더욱이 믿는 자들의 싸움은 병기를 가지고 싸우는 혈과 육의 전투가 아니고 정사와 권세,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움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악의 영 즉 마귀들과 대적하여 싸우는 영적 싸움이므로, 우리가 대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우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영적 승리만 있게 된다는 내용을 찬송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군병으로서 마귀의 꾐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으로 무장하여 사소한 일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므로 날마다 승리의 기쁨을 맛보며 사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절 우리들의 싸울 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 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 권세 힘써 싸워 깨쳐버리고죽을 영혼 살릴 것일세
지난날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을 비롯하여 지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전쟁에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체적인 싸움입니다. 393장의 찬송가에서는 이러한 육체적인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마귀 권세와의 싸움이 우리에게 놓여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4절에서도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12절에서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밝히고 있듯 우리의 싸울 상대는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살상이나 비방과 모략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 즉 마귀들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10장 4절에서 밝히고 있는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골로새서 2장 15절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4절의 가사에서 더 살펴보기로 하고, 찬송가 1절에서는 사탄의 권세가 우리를 어떻게 대적해 들어오는가? 에 대하여 분명히 깨달아 사전에 대비함으로 말미암아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15절에 보면 사탄은 광명한 천사를 가장하여 일어나며, 또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여 일어나며, 기적과 이사와 복만을 강조하는 거짓 영을 전파하며, 구원파, 여호와증인, 몰몬교, 통일교 등과 같은 거짓 복음 즉 다른 예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광명한 천사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가지고 오는 천사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에서는 이와 같은 거짓 복음에 대하여 미혹되지 않기 위해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도 길거리에서 몰몬교 교도들을 만났는데 “악수만하고 싶습니다.”는 인사법으로 접근하고 있었고 통일교는 결혼상담소 결혼중매 법으로 그 전도전략을 바꾸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은 건강법, 호흡법, 기 훈련 등으로 전도 전략을 바꾼 것을 봅니다. 이렇듯 거짓 교단들과 이단들은 기독교인들과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각종전략을 세우고 끊임없이 영혼의 사냥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병원에 늦게 들어갈 때 주차할 수가 없어 병원주위에 주차해놓으면 그 다음날 아침 차 문에 출장 마사지 등 각종 명함이 수없이 꽂혀 있는 것을 봅니다. 이렇듯 어두운 밤의 유혹과 사탄의 유혹은 집요하고도 힘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미국과 이라크와의 전쟁과 같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요 어두움의 마귀와 광명한 천사를 가장한 이단들과 거짓 선지자들과 대적하여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적 무기로 무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찬송가 2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절 우리들이 입은 갑옷 쇠가 아니요 우리들의 가진 검은 강철 아니요
하나님께 받아 가진 평화의 복음거룩하신 말씀이로다
미국은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초현대식 무기를 가지고 이라크를 기선제압 한 채 이라크 전역을 초토화 시켰습니다. 그런 반면 이라크는 나약해진 재래식 무기를 가지고 싸움을 했습니다. 이미 전쟁의 승패는 판가름 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영의 싸움은 육신의 싸움과는 달리 보이는 무기가 없기 때문에 제때 방어를 하지 못하고 쉽게 유혹을 받아 넘어지고 상처를 당하며 심지어 각종질병과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마귀란 놈은 게릴라처럼 한 번에 소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마귀란 놈은 영혼의 존재인지라 죽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 충만을 한번만 받으면 내 안에 있는 마귀는 한꺼번에 모조리 도망을 가고 영원히 오지 않기 때문에 안심하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귀란 놈은 우리가 우리의 몸을 갑옷이나 강철로 무장했다고 해서 못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적으로 조금만 나태하고 교만해져도 그 틈을 노리고 우리 안에 쳐들어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하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무기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2절의 가사에 쓰인 데로 “하나님께 받아 가진 평화의 복음, 즉 거룩하신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25절에 “우리의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 즉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 “또한 물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변함이 없다.”하였으며, 에베소서 6장 10-11절에서는“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바로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4-17) 골3:16에서도 기록되어 있듯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급주시는 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피차 사랑으로 가르치며 권면함은 물론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고 항상 기쁨에 넘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열광을 돌리는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대결에서 다윗이 투구와 갑옷을 다 벗어버리고 물매 돌 다섯 개 중 하나를 골라서 물매에 넣어 가지고 육척 거인 골리앗을 상대할 때에 로마서 8장 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삼상 17:46-47)는 말씀을 선포하고 나아가 골리앗의 머리를 향하여 물맷돌을 던진 결과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하였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완전히 승리했습니다.
다윗이 전쟁 경험으로 전쟁에 이겼습니까? 무기가 훌륭해서 이겼습니까? 키가 커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이겼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이 다윗 속에 믿음으로 흘러넘칠 때 강한 힘과 믿음과 용기가 나올 수 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에”(히 4:12) 어떤 마귀가 우리를 대적하여 올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능히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높이고 실천하며 행할 때 우리는 악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최대의 영적 무기임을 깨닫고 늘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의 감동과 조명아래서 승리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3절 악한 마귀 제 아무리 강할지라도 우리들의 대장 예수 앞서가시니
두려말고 용기 있게 힘써 싸우세최후 승리 얻을 때까지
전쟁에서 싸울 때 싸움을 지휘하는 대장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군사들이 대장의 지도력을 믿고 영웅처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적장의 목을 베느냐에 따라서 싸움의 승패(勝敗)가 결정되어 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성웅 이순신 장군도 살수대첩에서 적의 화살을 맞았을 때 곧장 화살을 뽑고 치료를 받았으면 살았을 텐데 전투 도중 대장이 보이지 않으면 적군에 의해 살해되었거나 겁이 나서 먼저 도망간 것으로 알고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전쟁에서 패하게 될 위험이 있으므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고 열심히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화살을 맞아 피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부하에게 “받침대로 나를 세워 적군과 아군에게 살아있음을 보이게 하라!”하여 목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휘봉을 잡고 지휘하므로 살수대첩에서 대 승리를 얻은 것처럼 전쟁을 지휘하는 대장의 자리가 그만큼 중요하고 귀중합니다.
이같이 3절의 가사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적 싸움 장에서 대장되심을 나타내고 있으며, 대장되신 예수를 좇아 두려워 말고 용기 있게 힘써 싸울 때에 싸움에서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다는 것을 찬양으로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역사적으로 싸움을 한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할 때는 이겼으나, 하나님이 떠나시면 비참하게 졌습니다. 신령한 전쟁을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중 세력을 잡은 마귀와 싸워서 이길 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주님이 우리의 대장이 되어 싸워주실 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승리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유일신신앙, 국론통일, 제공권 장악이 그것입니다. 전쟁 초 이스라엘은 ??우리는 공개할 수 없는 최신 무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무기 때문에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에 전 세계 군사전문가들과 미국의 정보당국은 극비리에 그 정체를 밝히기 위해 나섰습니다. 하지만 어느 정보기관도 그 최신 병기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밝힌 최신무기는 바로 그들의 신앙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우리는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과 치열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사단은 텔레비전 영상과 각종 전파와 사이버공간을 장악하기 위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일신 신앙의 재확립, 부단한 자기 갱신, 영적 무장 그리고 그리스도를 대장으로 모시고 연합하여 함께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4절 죄악 중에 빠진 사람 죄를 뉘우쳐 십자가에 달린 예수 믿기만 하면
위태한 데 빠진 영혼 구원 얻어서 천국 백성 될 것임일세
(후렴) 일심으로써 힘써 나가세 일심으로써 힘써 싸우세
마귀들의 군사들과 힘써 싸워서 승전고를 울리기까지
4절의 주제와 후렴의 주제는 ‘싸움에 임하는 십자가의 군사의 자세’와 승리의 참 요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엊그제 제가 000내과 병원을 방문하였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같은 의사직에 봉사하고 있는 모 교회 장로가 처음 교회에 나가 열심을 낼 때는 교회건축을 위해 땅도 기증하고 각종 헌물도 하면서 참으로 헌신적으로 봉사를 잘했는데 어느 날 담임목사님과 뜻이 맞지 않아서 더 이상 교회를 못 다니겠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한 성물 값과 땅 값을 챙겨 같고 나와서는 현재 이 교회 저 교회 돌아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왜 이런 사람들이 나올까요?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신앙의 기초를 말씀의 반석 위에 세우지 아니하고 자신의 의지와 체면과 직분 위에 신앙을 세워 놓으므로 시험이 오고 환란이 다가오니까 즉시 인본주의로 돌아서서 죄악 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성령 충만을 받기 전 의지적인 믿음의 열정을 가지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어느 날 다른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한밤중에 갈릴리 바다를 건너다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배가 좌초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지만 곧 침몰될 상태입니다. 그때였습니다. 누군가가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급히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다.” 하며 무서워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말라.”(마 14:27)며 위로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의지적인 신앙의 베드로는 급한 마음으로 “주님이 맞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의 마음과 믿음에 담대함을 심어주고자 “오라”고 답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너무나 반갑고 감사한 마음에 앞 뒤 재지도 않고 배에서 바다 위로 벌떡 뛰어 성큼 성큼 걸어 예수님께로 다가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마저 물위를 걷는 모습을 보고 응원의 박수와 감탄의 함성을 질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얼마가지 못하여 커다란 파도가 예수님의 모습을 가려버렸고 또 그 파도가 자신을 덮칠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자 죽음의 두려움이 다가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온 몸이 물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일 베드로가 예수님의 얼굴보다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더 의지하여 담대히 나갔더라면 결코 물에 빠지는 부끄러운 결과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보다 예수님과 같이 자신도 물위로 걸어보고자 하는 황홀경에 빠져 자신도 그렇게 영웅이 되어보고 싶은 충동에 물위로 겁 없이 뛰어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물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베드로에게 손을 내밀어 즉시 베드로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런 후에 쓴웃음을 지으시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고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최대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나갈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직분을 바라보고 나갈 때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패와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희가 진정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니라. 즉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만 바라보고 일심으로 힘써 나갈 때 비로소 승리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골로새서 2장 6-15절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서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게 될 때” 어느 누가 와서 꿀같이 달콤한 말로 철학과 속임수로 우리를 유혹할지라도 넘어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가 될 것입니다(엡 4:17-24).
결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신앙 선배인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은 일제의 총 칼 앞에서도 신상의 절개를 지키며 일심으로서 주님을 섬기며 찬양을 하다가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떠났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핍박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보다 더 큰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밤의 쾌락과 환락의 요정들이 신앙인들의 발걸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결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이 어두움의 주관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이제부터는 이방인의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고 또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처럼 믿음 안에서 행동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승리의 용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